大忠臣藏-島津亜矢///忠誠心の象徴、赤穂浪士(D)|★....演歌 게시판
大忠臣藏-島津亜矢 作詞 松井由利夫 作曲 村沢良介
“かぜさそふ はなよりもなほ われはまた“
ならぬ堪忍 耐えてこそ 武門の意地も 立瀬川 今はこれまで この一太刀を 吉良殿お受け 候えや 吾れ桜木の花と散る
「殿中にての刃傷沙汰は 罪萬死に値すること この内匠頭 重々承知いたしております さりながら積もる遺恨の数々・・・ 浅野家五万三千石 所領も捨て家臣を捨てての 覚悟の所業でござる 梶川殿・・・武士の情けじゃ この手を離しくだされ 今ひと太刀・・・ 今ひと太刀・・・
上野介を討たせてくだされ・・・梶川殿」
忠に生きるは 武士の道 命を盾の 槍ぶすま
敵を欺く 言挙げならば 瑤泉院さま 許されよ 雪ふりしきる 南部坂
「われら幡州赤穂の浪士 大石内蔵助以下 四十七名の者どもでござる この言挙げは私怨に非ず 天下の御政道の 是非を正すためなり おのおの方 かまえてその旨を 心にしかと刻まれい 忠左衛門どの・・・ 吉良殿の所在は末だつかめぬか 源五・・・東の空も白んでくるわ くまなく探せ われらの命運はあと半刻ぞ・・・
天よ地よ神よ仏よ 慈悲あらば われが本懐を遂げさせたまえ」
“吉良殿・・・見つかり申した・・・”
あれは山鹿の 陣太鼓 一打ち 二打ち 三流れ 一期一会は この世のならい 粒々辛苦 血の涙 暁染める 松阪町
忠誠心の象徴、赤穂浪士 日本人의 集團意識과 忠. 義, 意識이 잘 나타난 47名의 武士‘赤穂浪士(あこうろうし)’를 紹介합니다.
浪士(ろうし)는 主君이 없는 武士를 말하는데요.‘忠臣蔵(ちゅうしんぐら)’라는 이름으로 口傳된 이들의 이야기는 演劇이나 小說,映畵 等으로 制作되며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江戸城에서 벌어진 칼부림 事件 江戸時代 中期인 1703年 12月 14日. 47名의 武士가 幕府의 高位 官吏인 ‘吉良義央(きらよしひさ)’의 邸宅에 浸入해 ‘よしひさ’를 죽이는 事件이 發生합니다.
이 事件의 背景은 約 1年 半 前인 1702年 3月,지금의 兵庫 赤穂市(あこうし)에 該當하는 赤穂藩(あこうはん)의 領主 ‘浅野長矩(あさのながのり)’가 江戸城에서‘義央’에게 칼을 휘 두른 事件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当時 参勤交代(さんきんこうたい: 幕府에서 地方 領主를 統制하기 爲해 1年 걸러 江戸城에 머무르게 한 制度)로 江戸城에 있었던 ‘長矩’는 京都에서 오는 王室의 使者를 맞이하는 行事를 準備하고 있었는데 그 行事의 責任者였던 ‘義央’가 慣例를 잘 모른다며 비웃고 無視하자 화가 나 칼을 뽑아 든 것입니다.
‘義央’는 가벼운 傷處만 입고 목숨을 건졌지 만 江戸城에서 칼을 뽑는 것은 叛逆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当時 将軍(しょうぐん: 幕府의 支配者)이었던 徳川綱吉(とくがわつなよし)는 불같이 화를 내며‘長矩’에게 그날로 割腹 自殺하라는 命令을 내렸습니다.
제대로 된 調査도 하지 않고 事件 当日 自決하라는 命令을 내린 것은 当時로써도 무척 異例的이었는데요. 王室의 行事를 重要하게 여겼던 綱吉가 王에 대한 忠誠心을 드러내기 爲해 强行한 것이라는 意見도 있습니다.
沒落한 赤穂藩 ‘長矩’가 죽은 後 幕府는 浅野 家門의 城과 領地까지 沒收하기로 決定했지만 幕府의 有力 人士였던 ‘義央’에게는 罪를 묻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럽게 城과 主君을 잃게 된 赤穂藩 家臣 들은“主君에게 過失이 있다 해도 이번 싸움은 兩쪽 모두에게 罪가 있다. 幕府의 處分은 不 公平하다"라며 憤怒했고 武力으로 復讐해야 한다는 强硬派와 順順히 城을 내주고 家門을 再建해야 한다는 穩健派가 尖銳하게 對立합니다. 그러던 中 幕府의 使者가 6,000名의 軍士를 이끌고 到着했고 家臣의 우두머리인‘大石良雄(おおいしよしお)’는 强硬派를 說得해 順順히 城을 넘깁니다.
幕府는 赤穂藩의 家臣들이 復讐를 꾀하지 않을까 警戒하며‘良雄’의 行動을 注視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怨讐를 갚자고 재촉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는커녕 每日 밤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였습니다. 部下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失亡해 차츰 그를 떠나고 맙니다.
事實 그 동안‘良雄’는 幕府에서‘長矩’의 동생인‘長広(ながひろ)’를 後繼者로 認定하고 浅野 家門을 되살리도록 多方面으로 交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7月,幕府는‘長広’의 領地를 沒收한 뒤 広島로 歸鄕 보냈고 結局 赤穂藩은 沒落하고 말았습니다.
復讐를 決行! 浅野 家門을 復活 시키려는 目標가 사라지자‘大石’는 自己 아들을 비롯한 同志 46名을 모아‘義央’의 邸宅을 襲擊하기로 합니다. 事實 大石 亦是 復讐를 하려고 했으나 幕府에서 浅野 家門을 存續시키면 復讐할 名分이 없었기 때문에 事態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12月 14日 밤,47名의 武士는 요새 같은 邸宅으로 들어가 ‘吉良’家門의 家臣들과 싸움을 벌였고 結局 倉庫 안에 숨어 있던‘義央’를 찾아 목을 베었습니다.
復讐를 마친 이들은 곧바로 主君의 무덤이 있는 寺刹 泉岳寺(せんがくじ)를 찾아 목을 바치고 幕府에 自首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幕府에 出頭한 것은 46名뿐이었습니다 邸宅을 襲擊한 뒤 寺坂吉衛門(てらさかきちえもん)’이 사라진 것입니다. 襲擊 直前에 逃亡쳤다는 說,‘大石’에게 秘密 命令을 받았다는 說 等 多樣한 이야기가 있지만 眞相은 分明하지 않은데요. 그래서 47名의 武士인지 46名의 武士인지에 對해서도 論難이 있습니다.
‘赤穂浪士’에 對한 評價 이 事件은 幕府가 세워진 以來 戰爭 없는 時代를 살아온 武士들에게 많은 影響을 주었습니다. 勿論 2年이 지나 한밤中에 奇襲한 것에 對한 批判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主君을 爲해 復讐한 이들의 行動은 많은 稱讚을 받았고 武士의 본보기라는 意見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事實 이것은 将軍에 對한 復讐이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復讐한 ‘大石’는 ‘義央’를 죽인 後 自決할 수도 있었지만 幕府에 自首해 判決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将軍에게도 무척 어려운 決定이었습니다.‘赤穂浪士’는 忠誠스러운 臣下였지만 그들을 忠臣으로 만들면‘矩’를 죽인 幕府, 卽 自身의 決定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認定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結局 幕府는 그들의 忠心은 認定할지라도‘義央’를 殺害한 것은 幕府에 對한 反抗이라고 생각해 다음 해 2月 4日,46名 모두 自決하라는 命令을 내렸고 이들의 유해는 泉岳寺에 있는 浅野 家門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但,死刑시키지 않고 自決하라는 命令을 내린 것은 그들의‘武士道’를 考慮했기 때문이었겠죠. 또 그 들이 죽은 後‘吉良’ 家門 亦是 滅門시켜‘赤穂浪士’의 行動이 單純한 復讐가 아니었다는 点을 認定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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