琵琶湖周航の歌-倍賞千恵子 作詞 作曲 小口太郎 原曲 吉田千秋
一 われは湖(うみ)の子さすらいの 旅にしあればしみじみと のぼる狭霧(さぎり)やさざなみの 志賀の都よいざさらば
二 松は緑に砂白き 雄松(おまつ)が里の乙女子(おとめご)は 赤い椿の森蔭に はかない恋に泣くとかや
三 浪のまにまに漂えば 赤い泊火(とまりび)なつかしみ 行方定めぬ浪枕 今日は今津か長浜か
四 瑠璃(るり)の花園珊瑚(さんご)の宮 古い伝えの竹生島(ちくぶじま) 仏の御手(みて)にいだかれて ねむれ乙女子やすらけく
五 矢の根は深く埋(うず)もれて 夏草しげき堀のあと 古城にひとり佇(たたず)めば 比良も伊吹(いぶき)も夢のごと
六 西国十番長命寺 汚れの現世(うつしよ)遠く去りて 黄金の波にいざ漕がん 語れ我が友熱き心
歌の背景 1917年6月27日 旧制 第三高等学校(現 京都大学) 水上部의 멤버 7名은 5日間의 日程으로 学年末 恒例인 琵琶湖 周航에 出発하였습니다.
周航은 클루(crew)의 한 사람인 小口太郎의 葉書 內容이 同窓会報에 실린 “琵琶湖周航の記” 에서 周航 日程이 밝혀 졌는데 第1日째는 琵琶湖 雄松에서 一泊하고 2日째는 今津에서 3日째는 彦根에서 宿泊하고 4日째는 大津에 이르는 旅程이었습니다.
“琵琶湖周航の歌”의 原形은 2日째인 今津 에서 小口太郎가 만든 詩를 보고 感歎한 中安治郎가 클루(crew)에게 紹介한 것으로 4番까지 썼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谷口謙亮가 当時 三高에서 流行하고 있는 “ひつじぐさ” 멜로디에 맞추어 노래한 것이 그 由來입니다.
그 後 “琵琶湖周航の歌”는 三高의 学生들에 依해 代代로 이어져 現在 그들이 寄港했던 大津三保ヶ崎 에는 이 노래의 歌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琵琶湖周航の歌’는 오랜 歲月 一部 젊은이들 사이에서만 불려졌을 뿐 一般人들에게는 大部分 알려지지 않았는데 1971年4月 加藤登紀子에 依해 “日本哀歌集”이란 앨범을 発表하면서 “디스커버(discover)・저팬” 붐을 타고 爆発的으로 히트하였습니다.
“디스커버(discover)・저팬”에 의해 “知床旅情”의 作詞 作曲者는 잘 알려졌습니다만 “琵琶湖周航の歌”의 小口太郎에 對하여는 아는 사람이 없어 “루트 찾기”가 行하여 지면서 小口太郎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小口太郎는 1897年 信州諏訪湖 西岸의 湊村에서 태어나 旧制 諏訪中学에 入学합니다 그의 人間性에 對하여는 親舊 小口大次는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습니다.
容貌는 端麗 優雅 女性的이며 눈이 가늘고 보조개가 있으며 性格은 温和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競爭하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마음속에는 自己의 굳은 信念은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아려져 있습니다.
1916年 小口太郎는 三高에서 理工農進学코스를 밟고 있었는데 頭腦가 至極히 明晰하고 真摯한 印象을 주는 便이었습니다.
三高 卒業 後 東京帝国大学 物理学科로 進學하여 3年 在学 中에 “有線及び無線多重電信電話法”을 発明하고 여러 個의 特許를 받았습니다.
東大 卒業 後 航空研究所에 들어갑니다만 徴兵検査에서 病이 確因되어 退所하여 療養을 받습니다만 1924年 5月 26歲의 젊은 나이에 死亡합니다.
이 때 그는 諏訪中学의 後輩인 浜徳太郎의 女同生 “すず”와 婚約하고 있었습니다만 浜家에게는 太郎은 脳溢血로 死亡했다 라고 伝해 지고 있습니다만 実際는 自殺이었습니다 그는 “ウツ病(憂鬱病)”에 依한 自殺을 否定할 수 없는데 徴兵検査에 合格하면 入営하게 되고 入営 中에는 研究로부터 멀어 져 외고집 性格인 太郎 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운 것으로 이것이 発症의 原因이 아닌가도 합니다.
“琵琶湖周航の歌”는 加藤登紀子에 依해 全国的으로 알려지고 作詞 作曲 家가 小口太郎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曲이 “ひつじぐさ”의 멜로디로 노래한 것이 알려져 作曲者를 찾는 일이 일어나 旧三高의 OB가 吉田千秋라는 作曲者를 밝혀냈는데 이 OB가 누군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
吉田千秋는 1895年 吉田東伍의 둘째 아들로 新潟県에서 태어났습니다. 吉田東伍는 이름이 높은 歴史地理学者로 “大日本地名辞書”等을 著作하여 文学博士입니다 그러나 学歴이 없기 때문에 大部分 在野인 채로 보냈습니다.
千秋는 아버지의 일로 어릴 때부터 여러 차래 新潟와 東京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2살 때 上京하여 牛込区의 赤城尋常小学校에 入学하여 1年生인 때 小鹿尋常小学校로 轉學합니다 4学年 修了 後 新津高等小学校로 進学하고 1906年에 上京하여 赤城高等小学校에 編入합니다.
1907年 東京府立 第四中学校에 進学해 1912年 卒業과 함께 東京農業大学에 進學합니다 그러나 그의 運命은 暗惑으로 轉落되여 다음 해 結核으로 休学하고 곧 退学합니다.
1914年 神奈川県 茅ヶ崎의 南湖病院에 入院하였다가 1915 祖父母 가 사는 小合 마을에서 療養하면서 動物植物 天文学 方言学 音楽 文学 宗教 等에 関心을 보이면서 作詞 作曲에 熱意를 쏟습니다.
그러나 病은 好転되지 않아 1919年 24歳인 2月에 死亡하였습니다.
“ひつじぐさ”의 原詩는 英國의 童謡集“Songs for our Little Friends”(Frederick Warne & Co.London,1875)안의 한 曲“Water Lilies”입니다 Water liliy는 睡蓮으로 日本名은 “ヒツジグサ”입니다.
原詩는 1聯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만
Misty moonlight,faintly falling O'er the lake at eventide, Shows a thousand gleaming lilies On the rippling waters wide
千秋가 이것을 日訳한 것은 1913年 18歳인 때라고 합니다만 結核으로 入院中인 時期로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이것을 雑誌“ローマ字”에 投稿하여 同年9月号에 掲載되었습니다.
睡蓮(ひつじぐさ)
一 おぼろ月夜の月あかり かすかに池のおもに落ち、 波間に浮かぶ数知らぬ ひつじぐさをぞ照らすなる。
二 雪かとまがふ花びらは こがねの蘂(しべ)をとりまきて、 波のまにまに揺るげども 花の心は波だたず。
三 風吹かば吹け空くもれ 雨ふれ波たて、さりながら、 あだ波のした底ふかく 萌えいでたりぬひつじぐさ。
이 藤村 風의 文語 詩를 18歳의 少年이 썼다는 것입니다. 訳詞라고 해도 이 水準이면 오리지널 이라고 해도 過言이 아니겠지요 千秋는 短歌의 習作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長壽하면 文芸分野든 音楽分野이든 많은 業績을 남겼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夭折가 참 아쉬워 집니다. 이 詩에 自身이 曲을 붙인 것입니다만 이것을 雑誌“音楽界”에 1915年 8月号에 掲載되었습니다. 이 雑誌는 새로운 楽曲이나 音楽関係論文을 掲載하는 著名한 月刊音楽誌로 이 雑誌에 依해 “ひつじぐさ”라는 노래를 알아낸 三高의 学生의 누군가가 이것을 校内에 퍼트린 것이지요 名曲 “琵琶湖周航の歌”는 이런 東西의 豊盛한 感性의 意図가 서로 만나 誕生하였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