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포구의 인사- 남인수///元曉와 義湘

bsk5865 2014. 10. 26. 08:2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0.26 05:51

 

포구의 인사- 남인수///元曉와 義湘(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043 


포구의 인사- 남인수


포구의 인사- 남인수

작사 김다인 작곡 이봉룡


포구의 인사란 우는 게 인사러냐
죽변만(竹邊灣) 떠나가는 팔십 마일 물길에
비 젖는 뱃머리야 비 젖는 뱃머리야
어 데로 가려느냐 아 ~


학 없는 학포(鶴浦)란 어이한 곡절이냐
그리운 그 사람을 학에다 비겼는가
비 젖는 뱃머리야 비 젖는 뱃머리야
어 데로 가려느냐 아 ~


해협을 흘러가는 열 사흘 달빛 속에
황소를 실어 가는 울릉도(鬱陵島) 아득하다
비 젖는 뱃머리야 비 젖는 뱃머리야
어 데로 가려느냐 아 ~


元曉와 義湘


거칠 것 없는 자유인 vs 철저한 수행자

元曉

다른 이름: 설서당(薛誓幢)/설신당(薛新幢)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불교를 정선적 지주로 삼았다. 이때 신라의 불교계를 이끈 두 인물이 원효와 의상이다. 한국불교사의 양대 산맥,원효와 의상은 같은 대를 살며 학문을 나누었지만,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도의 길을 걸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각기 한 여인들과의 일화가 전하는데,그 인연을 맺고 푸는 방식이 두 사람이 걸었던 길만큼이나 달라 흥미롭다.

우선 원효의 이야기. 신라 무열왕 때의 일이니 원효의 나이 서른 아홉에서 마흔넷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중생들이 연연하는 세속적인 사랑이 궁금했던 것인지 어느 날부터 그는 거리로 나가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아무도 이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무열왕은 원효의 뜻을 알아차리고 사람을 보냈다. 원효는 일부러 다리 아래에 떨어져 옷을 적셨고 사신은 일찍이 사별하고 홀로 있는 요석공주의 처소로 원효를 안내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 사이에 얻은 아들이 설총이다. 설총이 뒷날 뛰어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하늘 받칠 기둥을 얻긴 얻은 셈이다. 요석공주와의 세속의 인연 이후 원효 근 스스로 복성거사(卜生居士) 또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며 속인(俗人) 행세를 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었고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자유인의 모습이다.


義湘

그 다음은 의상의 일화다. 의상이 당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신도 집에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는데,이때 그 집의 아리따운 아가씨 선묘가 의상을 사랑하게 됐다. 그러나 차돌처럼 단단한 의상의 마음은 움직일 줄 몰랐다.

10년 세월을 짝사랑으로 보낸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해변으로 달려갔다. 배는 이미 저만큼 떠나 있었다. 선묘는 바다에 폼을 던져 한 마리 큰 용으로 변해 신라로 가는 뱃길을 도왔다. 그 뒤 용으로 변한 선묘는 부석사의 우물에서 살며 부석사의 창건을 도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화엄(華嚴)사상 한 가지에 정진하던 의상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원효와 의상은 출생과 성장 과정부터가 달랐다. 원효는 617년(진평왕 39) 경북 자인에서 설담날의 아들로 태어났다. 설씨는 6두 품 성씨 중 하나이다. 소년 시절에는 화랑의 무리에 속했으나 도중에 깨달은바 있어 출가를 결심하고 자기 집을 헐어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지 않고 각종불교서적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했다.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하고,시대적으로 보아 원광과 자장으로부터 불도를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했다.

원효가 신분상승에 한계를 갖는 6두 품 출신이었던 데 반해 의상은 진골 출신으로 원효보다 8년 늦은 625년(진평왕 47) 김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진골이었으니 유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열아흡 살에 불가에 귀의했다.

이 두 사람이 어느 때에 처음 만났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경주에서 비슷한 해에 출가해 뛰어난 재주로 이름이 높았고,왕이 그들을 불러다 설법을 듣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자연스레 교유(交遊)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기에 이른다. 650년(선덕여왕 4) 시도한 첫 번째 유학 길은 랴오둥 땅을 지나다 고구려 수비군에게 잡혀 귀환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리 고 10년 뒤 두 번째 유학 길에서 원효와 의상은 유명한 설화를 남기며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한다.

설화에 따르면 배를 타기 위해 가던 두 사람은 오늘날의 충남 직산 부근을 지나다가 심한 폭우를 만났다. 밤이 깊어 몇 걸음 앞도 분간할 수 없어서 우연히 찾은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자다가 목이 타 일어난 원효가 물을 찾았는데,마침 물이 담겨 있는 바가지가 손에 잡혀 시원스레 마시고는 다시 단잠에 빠졌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옆에 먼지가 가득하고 빗물이 괴어 있는 해골바가지가 보였다. 토굴인 줄 알았던 그곳은 무덤 속이었고,바가지는 해골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한 순간 눈 앞이 환해지고 가슴이 탁 트이는 기쁨을 맛보았다.

“마음이 일어남에 온갖 것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토굴과 무돔이 둘이 아니로다. 삼계(三界)가 오직 한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인식이라,마음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만물유심조(萬物唯心造). 이것을 깨달은 원효는 발길을 돌려 서라별로 돌아가고, 의상은 예정했던 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의 이러한 선택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후로 더욱 다른 구도의 길로 이끈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더욱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스스로 광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알렸다. “모든 것이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노래 말은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무애가:無碍歌〉라 했다. 남루한 옷을 입고 광대에게서 얻은 표주박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원효는 경전의 갚은 의미를 몰라도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염불을 되풀이해서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원효의 이러한 교화 덕분에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 을 염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백성들 속에서 불교 대중화 운동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에도 힘을 쏟아 경전 주석서를 쓰고 화엄경을 강의했다. 원효의 학문은 법성종(法性宗) 계통의 사상을 중심으로 여타 종파나 사상을 흡수•통합했으며,심지어 노장사장이나 의술에도 관심을 갖었다.

원효사상의 특정은 크게 일심(一心).화쟁(和諍).무애(無碍)로 정리할 수 있다.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조화롭게 받아들였으며(화쟁),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무애)이었지만,항상 인간의 본각(本覺),곧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일심)로 설정하고 실천을 강조했다.

한편,원효와 헤어져 혼자 당나라로 건너간 의상은 화엄종(華嚴宗)의 대종사인 지엄을 찾아갔다. 지엄은 절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밤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자라 그 가지들이 중국을 온통 덮어버리는 꿈을 꾸고 의상이 올줄 알았다고 했다. 의상은 지엄 밑에서 8년 동안《화엄경》의 진수를 공부했다.《화엄경》은 부처가 수도와 공덕을 쌓아 법계평등(法界平等)의 진리를 설법한 경전이다. 의상은 《화엄경》의 요지를 일곱 자를 1구로 하여 모두 30구에 담은 〈법성게: 法性偈〉를 지어 스승에게 바쳤다. 이것을 본 스승은 제자의 학문이 갚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찬탄해 마지 않았다. 의상의 본격적 저술로 유일한 이 〈법성게〉는 오늘날 에도 절에서 의식 때마다 암송되고 있다.

이 무렵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려 하자 당이 신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신라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감옥에 갇혀 있는 김인문 • 김양도로부터 이사실을 들은 의상은 곧 귀국길에 올랐다.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낙산사와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경을 강론했다. 원효가 화엄과 대승,소승,심지어 노장사상에까지 관심을 보였던데 반해 의상은 오직 화엄학 한 가지에 진력하며 관음 신앙(觀音信仰)과 정토신앙(淨土信仰)을 수용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가르침이다.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다”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다.

의상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저서도 짧은 게송류이다. 오직 이 땅에 화엄사상을 세우고 제자를 기르고 사찰을 세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의상의 제자들은 3,000에 이르렀고,그가 건립한 사찰을 지금도 화엄십찰이라 한다.

원효처럼 백성들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의상도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애썼다는 이야기가《송고승전》에 전한다. 문무왕 이 의상의 공을 치하하며 땅과 노비를 내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의상은 “불법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이 없습니다. 어찌 내가 땅과 노비를 받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또한 이 책은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하게 여겨 강의를 하는 일 외에는 수련을 부지런히 했다. 또 의복과 병과 발우 세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다”고전한다.

한편,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라고 명령하자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이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해도 백성이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 지만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 할 것입니다’ 라는 글을 올려 역사(役事)를 중지시키기도했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원효가 의상을 만나 교리상의 의문 세가지를 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원효와 의상은 지속적으로 학문적 교류를 했던 듯하다. 원효가 선배이고 불교학의 여러 분야에 박식했지만,화엄 학의 새로운 이론은 분명 의상이 밝았을 것이다. 원효는 자신의 저서에서 수전법(數錢法)은 지엄법사의 설인데,의상법사가 전한 것으로써,그 뜻을 헤아려보니 도리가 있기에 서술하는 것이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원효는 중년 이후 저술에 정진했다. 민중불교를 제창하고,어느 종지에 집착하지 않는 총화불교(總和佛敎)를 주장하며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 전하는 것은 20부 23권에 지나지 않지만 총 99부 24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말과 행동에 거칠 것이 없었던 자유인 원효와 철저한 수행자였던 의상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서로 통했고,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한국불교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다.


설총

신라의 학자 아버지는 원효,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경사(經史)를 두루 알았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한 사람,또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삼문장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설총이 이두를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두를 집대성,정리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많은 작품이 있었을 텐데 이미《삼국사기》편찬 때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