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아 사랑-남인수 작사 박영호 작곡 박시춘
一 달뜨는 저녁에 지은 맹서가 꽃피는 아침에 무너졌구려 봄 없는 청춘은 이런 것이냐 울어도 웃어도 풀 길이 없네
二 세월은 덧없고 인생은 늙고 못 잊을 미련만 어이 길던고 뜬세상 인정은 이런 것이냐 속아도 내 운명 속여도 내 운명
三 상처 진 내 가슴 달랠 길 없고 가버린 옛사랑 찾을 길 없네 꿈같은 과거는 눈물이 드냐 버들잎 사랑은 물방아 사랑
金春秋 다른 이름: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무열왕(武烈王)
생애와 업적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이다. 진지왕이 폐위된 이후 김춘추 집안은 한동안 권력에서 멀어져 있었다. 진평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기는 했으나,여전히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는 진골이었다.
이런 소외감은 가야계라는 신분적 한계를 갖고 있는 김유신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집안은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과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 때부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춘추가 김유신의 동생과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이때 사위와 딸이 죽자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 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김춘추는 원병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다. 개인적인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무렵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에 신라는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고구려의 보장왕을 만난 김춘추는 구원병을 보내달라 간곡하게 청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죽령 서북이 본래 고구려의 땅이니 이를 돌려주면 군사를 보내주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면서 막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의 판단일 것이다. 연개소문은 강적 당나라와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신라보다는 백제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보장왕의 말에 김춘추가 반발하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가두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된 김춘추는 고구려의 귀족 선도해에게 많 은 뇌물을 바치며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선도해는 귀토지설(龜兎之說),즉 토끼와 거북의 설화를 들려주었다. 육지로 다시 데려다주면 자신의 간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하는 토끼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은 김춘추는 귀국하면 그 땅들을 돌려보내도록 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후 김춘추는 왜에 군사를 빌리러 가기도 했지만 이 역시 실패 했다. 또한 당나라에도 사신을 보냈으나, 선덕여왕에 대한 조롱만 듣는다. 이 때문에 647년 비담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기는 했으나 김유신의 활약으로 난은 진압되었다.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는 중앙집권체제 정비에 착수했다. 당시로서는 가장선진적인 당의 율령제도를 모델로 하여 관료체계를 정비했으며,지방제도와 군사제도 등을 개편했다. 또한 648년에는 결국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 무렵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당 태종이 김춘추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 태종은 백제를 평정하고 이어 고구려까지 정벌할 것을 제의했다. 전쟁이 끝난 뒤 평양성을 경계로 영토를 분할한다는 약속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약속이 실현되는 데는 당나라의 내부 사정상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춘추는 귀족회의의 추대를 받아 53세의 늦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었다. 그리고 660년 드디어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당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백제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김춘추는 고구려 정벌까지 지켜보지는 못했다. 다음 해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킬 무렵 세상을 떠나,그의 아들 법민이 왕위를 이었다.
나당연합군의 첫 번째 고구려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연개소문의 승리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뒤 권력층의 분열을 겪고 있던 고구려는668년 나당연합군의 재침에 결국 무너졌다.
이후 신라마저 예속(隸屬)시키려는 당나라와 결전에 나선 문무왕은 671년(문무왕 11) 매소성 전투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다음 해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 대부분을 앓어 버린 이 결과를 삼국통일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더구나 고구려가 멸망한 30년 뒤 그 땅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세워져 한반도가 다시 남북으로 나뉘어졌다.
평 가 692년(신문왕 12) 당나라와의 외교 분쟁은 신라인들이 김춘추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당 태종이 위대한 공적을 남겼으므로 묘호를‘태종’이라 했는데,어찌 김춘추에게 같은 묘호를 썼느냐며 고치라고 했다. 그러나 신라는‘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별세 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 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聖祖)와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라며 당나라의 지시를 거부했다.
유교명분론이 지배하던 고려•조선시대까지도 김춘추는 사대의 예를 다하고 그 문물을 받아 거친 풍속을 다듬고 고쳤으며,당의 위엄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성세를 이룩한 뛰어난 임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근대적 민족주의가 새로운 시대적 이념으로 제기되면서 그 평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충과 사대 대신 민족과 자주가 평가의 기준으로 등장하면서,김춘추는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몰락시킨 외세의존적 음모가로 추락해야 했다.
광복후 김춘추에 대한평가는 또다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존재하고 있는데 과연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지,또 김춘추가 과연 민족통일의 의지를 갖고 있었는지 논란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해 민족통합의 초석을 다진 민족의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이용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한 뛰어난 외교가 다는 점이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