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士山やぶさめ祭り-三波春夫 作詩 沢登初義 作曲 山本丈晴
一 鹿の行縢(ムカバキ)きりりと締めて 弓矢かざせば いななく神馬 富士も晴れたよ 大原七郷 御室浅間 御室浅間 やぶさめ祭り
二 桜真盛り いざ御召覧 心ときめく やぶさめ太鼓 祭神木花 姫君様へ よせる人波み よせる人波み やぶさめ祭り
三 駒は甲斐駒 富岳の育ち 腕は武田の 筋金仕込み 満としぼった 鏑矢 鷹羽 甲斐の勝山 甲斐の勝山 やぶさめ祭り
やぶさめ祭り 冨士 御室 浅間神社의「流鏑馬(やぶさめ=말을 타고 달리면서 우는 화살로 과녁을 맞히는 武藝)神을 祭祀 지내는 일」은, 900年 以上의 伝統이 있어 八幡太郎 義家(源義家)의 同生, 新羅三郎義光(甲斐源氏의 遠祖)가「後三年의 役」의 戦勝을 祝賀해 奉納한 것으로부터 始作됩니다.
그 뒤 勝山을 中心으로 大原七郷의 親族에 依해 盛大하게 奉納되어 祭政一致의 時代를 만들었습니다. 明治의 改革인, 四民平等, 家格貴賎의 撤廃, 또 清日戦争 等으로 大原 七郷의 마을 出金이 좋지 않아 잦은 休止, 復活를 反復하면서 結局 明治30年을 最後로 中断하였습니다.
昭和55年4月에 84年 만에 다시 復活시켜 옛 式의 優雅한 「武田流やぶさめ」를 中心으로 住民 総 参加의 ふるさと祭り로서 毎年 開催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습니다.
九月十九日 에 擧行(齋行)되는 이 祝祭는 同時에 富士山 二合目 鎮座의 小室 浅間神社의 附近 馬留ヶ馬場에서 行하여 지고 있어, 勝山村(現冨士河口湖町勝山)과 共同으로 奉仕하고 있었지만, 할 때마다 마을間의 싸움이 激烈하게 重捷되는 流血 騷動에까지 発展하는 것으로부터, 西暦一五三〇年(享禄三年) 武田家 家臣 板垣信賢의 達에 依해 各自의 마을에서 行하여 지게 되었습니다.
그 後 再三에 渡り馬場의 変遷이 있었지만, 現在의 競馬場은 明治 初年으로 부터라고 伝해집니다. 以來 現在에 이르나, 옛날의 時代 그대로, 朝夕役馬, 山王祭의 騎者 等의 옛 式이 伝해 지고 있습니다.
한便, 勝山村의 やぶさめ祭는 정말로 遺憾스럽지만 明治三〇年에 끊어지고, 昭和五十五年에 復興되나 武士의 流鏑馬로 変해 오랜 옛날의 歷史를 여기에서는 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 流鏑馬祭り는 市 無形 民俗文化財로 指定되어, 一般的으로 알려져 있는 武士의 流鏑馬나, 他 神社 等에 奉納되는 것과는 다르며, 九月一日에 擧行되는 初馬揃式으로부터 始作되는 多數의 前儀와 함께, 奉仕者는 一週日間에 미치는 「切火」라고 불리는 嚴格한 淸潔히 함(世上 日常과 떨어져 祭祀者로서의 資格을 完成하고, 心身을 淸淨하게 하기 爲해서 틀어박히는 것)에 그 意義와 特色이 있습니다.
特히 말이 급히 달린 발자국에 依한 吉凶의 「말굽占」은 世襲의 「占人」의 存在와 함께 이 神을 祭祀 지내는 일을 著名한 것을 所有하고 있어, 日本의 文化的 源流를 가지는 貴重한 祝祭입니다.
每年 やぶさめ祭り가 끝나면, 親族区域 각 마을에서는 各各 神官을 招待하고, 流鏑馬祭り에서의 「말굽占」의 結果를 바탕으로 「お日待ち・秋葉講」이라고 불리는 祭禮를 行합니다.
마을 內 各 家庭은 祈願의 뒤, 한 장 작은 종이 늘어뜨림을 주고, 앞으로의 一年間 마을 內에 火災나 다툼의 禍가 없고 無事하게 지낼 수 있도록 祈願하는 行事가 11月 初旬 頃까지 繼續됩니다. (御日待ちとは=燃える火の事ではなく次の朝日、つまり夜を明かし神様に祈り、各班毎に「近所隣り同志で」様々な話をしながら朝日を待つ事です)
정말로 「村の祭り」는 옛날의 좋았던 「日本の村組織」을 지금에도 伝하는 貴重한 祝祭입니다. 또, 當 神社에 隣接한 下吉田 第一小学校에서의, 運動会에서는 やぶさめ를 테마로 한 프로그램이 있어, 어린이들이 鄕土의 歷史를 熱心히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