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萬病通治藥 金鷄蠟

bsk5865 2015. 10. 9. 08:4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10.09 06:44

 

博多雨-夏木綾子///萬病通治藥 金鷄蠟(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915 




博多雨-夏木綾子

作詞 瀬戸内かおる 作曲 岸本健介


愛の絆の 結び目そっと
あなたほどいて 消えた人
待つことだけしか 知らなくて
つのる想いが 涙に変わる
ほろり…泣かせる
みれんしぐれか 博多雨


他の誰より 幸せそうに
影が寄り添う であい橋
思い出かさねた この街で
いつかはぐれて ひとりのお酒
ほろり…こぼれる
吐息まじりの 博多雨


傘を斜めに 路地裏づたい
ひとりしぐれて 帰ります
夜更けて淋しい こんな夜は
雨の向こうに あなたが滲む
ほろり…泣かせる
中洲那珂川 博多雨


萬病通治藥 金鷄蠟

"이틀에 한 번 앓는 瘧疾(학질)을 俗稱 當瘧(당학)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病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 10名 中 4~5名이 死亡할 뿐 아니라 힘이 强한 少•壯年層도 數年 동안 廢人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金鷄蠟이 西洋으로부터 들어온 以後 1錢어치의 量만 먹어도 瘧疾이 卽時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牛痘法이 들어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金鷄蠟이 들어와 老人들이 壽를 누린다"는 流行歌가 나왔습니다."('梅泉野錄')

金鷄蠟은 퀴닌(quinine)의 다른 이름으로 말라리아의 特效藥이었습니다. 말라리아는 熱帶 地方에서 溫帶 地方까지 廣範圍하게 퍼져 있던 風土病입니다. 韓國에서도 여름이면 찾아오던 '瘧疾'이 말라리아의 一種이었습니다. 韓國 瘧疾은 熱帶 地方의 말라리아에 比해 症狀이 弱해, 젊고 健康한 사람은 藥을 먹지 않아도 낫곤 했습니다. 하지만 對症療法 外에는 別다른 治療藥이 없어 老人•兒童 等 免疫力이 弱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王室에서 奴婢에 이르기까지 階層에 關係없이 瘧疾에 걸렸고, 壬辰倭亂 동안에는 人口의 70~80%가 瘧疾을 앓을 程度로 傳染性이 强했습니다. (韓國 傳染病史)

開港 以後 輸入되기 始作한 金鷄蠟은 瘧疾 治療劑로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습니다. 金鷄蠟은 韓國 最初의 西洋式 病院인 濟衆院에서도 斷然 人氣가 높았습니다. 國立醫療機關으로 出帆한 濟衆院은 設立 初期 不必要한 診療를 막기 爲해 形式的으로 治療費(20~50푼)와 藥값(100푼• 0.06달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施療 機關의 性格을 살리기 爲해 몇 달 後부터는 그마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藥은 無料로 주기 始作했지만 金鷄蠟만은 10알에 500푼이나 받고 팔았습니다. 金鷄蠟의 效驗을 알게 된 사람들이 常備藥으로 쓰기 爲해 必要 以上으로 얻어가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濟衆院 患者 中 말라리아 患者가 가장 많았던 것도 金鷄蠟의 卓越한 效驗 德이었습니다.

金鷄蠟은 以後 瘧疾 治療 外에도 解熱劑, 鎭痛劑, 强壯劑 等 萬病通治藥으로 通用되었고, 玉洋木(玉같이 고운 西洋 綿布), 石油와 함께 가장 인기 높은 西洋 商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韓國에 進出한 西洋 商人들은 韓國의 金鷄蠟 市場을 놓고 角逐을 벌였습니다. 獨逸인 마이어가 濟物浦에 設立한 世昌洋行(E. Meyer & Co.)은 '獨立新聞'에 金鷄蠟 廣告를 600余 次例나 실었습니다.

"世昌 洋行 濟物浦. 世界에 第一 좋은 金鷄蠟을 이 會社에서 또 새로 많이 가져 와서 파니 누구든지 金鷄蠟 장사하고 싶은 이는 이 會社에 와서 사거드면 都賣金으로 싸게 주리라."

金鷄蠟이 人氣를 끌자, 市場에 가짜가 넘쳐나고, 過多 服用하는 等 副作用도 적지 않았습니다. 毒藥을 金鷄蠟으로 잘못 알고 먹어 목숨을 잃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金鷄蠟은 醫療 死角地帶에 놓인 庶民들의 '非常 藥品'으로 1960年代까지 人氣를 이어갔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