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카 내외 곁에서 (暻雨결혼축하)
일생을 통해보면 7년이 짧은 시간이지만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평화롭고
화려했던 것이 솔무래 새집짓고 살때인것 같다. 말년엔 어이없는 일을 당
했지만.....
부랭이 그 집을 짓기 시작한 이전 부터 큰집 장조카와 질부의 신세를 많이
졌었다. 잠자리 조석식을 너무 많이 얻어 먹어 염치없었지...그렇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고 숙질연(叔姪緣)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위에 힘드는
일도 도움받고 새집에 필요한 여러가지를 많이 거들어 주었었지....나 또한
의지하고 싶었으며 늘 버팀목이 되어 주어서 고마왔다.
숙질간이지만 비슷한 노경(老境)에 별 허물없이 믿고 지낸 세월이 좋았고
그리워진다. 어느해 도지로 받은 쌀을 나누어 얻어 올때의 마음...고향쌀이란
의미와 함께 고맙고 즐겁고 행복했었다. 그때는 모르는 것도 많아 배와가면서
살았고 전기 전화 TV등은 장조카의 손이 안가면 쓸 수가 없었다. 이런것들을
잘 만지느 것은 큰형님의 재능을 이러받은 것이리라....
그리고 부랭이를 중심으로 많이 어울려 다녔었다. 특히 이서방 최서방 내외
와는 달마다 모였고 봄이면 산나물. 야생화. 문양의 표고.백헙. 가을송이. 약수
터. 동해안의 생선들...헤아릴 수 없는 옛추억은 가슴에 가득하고 우리 내외는
그때가 그리워 가슴이 아려올 때도 많았다. 그렇게 살아온 혈육의 정을 눈감
기 전에는 어찌 잊을 수 있으랴...같이 곁에 살아 주어서 고맙고 흘러간 세월에
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싶을 만큼 행복했었다.
지난 2015, 5, 장조카 내외의 초청을 받아 고향 부랭이의 달라진 모습을 살펴
봤고 인생무상이라지만 허무함을 실감했다. 내 정든 곳은 간곳 없고...
그날 수서도 만나 숙질간의 일행 5명이 같이 행동했었다.
안동에서 맛으로 소문난 버섯식당에서 진귀한 버섯의 맛을 봤고 고향으로 달려
창평에 새로 생긴 나무박물관도 구경했다.
고향의 정든 수호신 느티나무 밑에서 정차(停車)해 보니 그 앞의 문전옥답엔 낯선
현대식 건물이...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기 싫었다. 전원도시로 가꾼다고 시작
했던 일들... 당국이 계획대로 못하고 우리는 속아 고향만 잃었다.
안동으로 돌아와 속칭 별장이라는 수서소유의 산장(山莊)에서 1박...일족이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오래도록 불고기. 윷놀이의 흥이 뇌리에 쌓여있다.
이튿날 신도쳥(新道廳)의 웅장한 모습도 수서의 공사현장. "탈"박물관. 한지공장...
두루 잘 살펴봤다.
잊지 못할 맛집은 풍산의 수성식당..맛도 별미 .음식도 푸짐.. 지금도 그때 그 식탁
생각하면 군침 돈다.
이제 모두 90을 바라보는 고령! 얼마 남지 않은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 이것이
마지막이 될수도 있는것이니 서글픈 생각과 함깨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부랭이에서 살때 경우 남매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방에서는 어려운 서울
명문대학을 거쳤으니 앞날이 촉망되는 우리 집안의 기대주가 되고도 남는다.
찬주 내외가 부모를 잘 모시는 모습이나 맏이로서의 처신이 반듯해 보기 좋았고 부러
움의 대상이었다. 부모가 계시기에 단녀갈 때도 우리 집까지 꼭 찾아 주었고 빈손으로
오는법은 없었다. 그런것을 보고 자란 남매였고 재질도 겸비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젠 안동이란 곳이 낯설지 않고 친근감이 드는 것은 장조카와 수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 것이리라...
걱정할 일이 있어도 내색치않고 항상 온화한 가운데 활동력이 비범했던 질부의 인품
이 매양 대견스러웠다. 늘 보태주고 흡족해하는 마음을 지녔기에 우리는 그것을 염치
없이 받기만 하면서 부랭이 생활을 즐겼었다.
지금 까지도 우리 내외에게 각별한 정표가 이어지고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쓸모 없이
뒷전에 밀려 천덕구러기가 된 힘 없는 늙이를 누가 관심을 갖겠느가!
평소에도 안부를 자주 물어오지만 명절이나 생일때는 어김없이 전화를 주었었다. 그
것으로 큰 위안을 받아 흘러들어온 객지의 서름을 덜 수 있었다. 길이 건강하고 즐거운
여생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실어 보낸다. 이렇게 적선(積善)했으니 그 앞날은
찾아올 경사만 줄을 서 기다리고 있을것이다......E
<暻雨 결혼 축하>
2008년 고향 부랭이를 영영 떠난후의 세월이 놀랄 정도로 많이 흘렀다. 여기까지 내가
아직 살고 있다는 것은 내 신체조건으로 봐서 예상 못한 일이다. 그 덕택으로 작고는
하셨지만 우리집 제일 큰형이 증손부를 맞이한 기쁜 날도 있었다. 경사의 현장엔 못 갈
지라도 혼주 찬주에게 기쁜 마음을 글로 적어 보내고 반갑고 한편 미안한 마음을 달랬
었다. 울리고 살았던 5형제의 대가족을 아우를 힘의 쇠퇴(衰退)를 슬퍼하면서.......
贊柱야! 반갑다.
暻雨 결혼을 깊이 축하한다.
찬주도 이젠 며느리를 본 집안의 큰 어른의 자리에 올랐구나.
2000년대 봉성 고향에 머물고 있을때 찬주 내외는 자주 찾아와 문안하는 반듯한 범절
을 보였었고 커가는 다정이도 경우도 그때 본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데 벌써 대학
도 군복무도 마치고 결혼까지 했으니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이제 90 문턱에 와 있으니 이 늙은 모습으로 경사스런 곳이라도 출입을 삼가고 있는지도
오래 됐다.
찬주야. 그래도 우리 집안의 제일 늙은이로서 그냥 있을 수 없어 이렇게나마 축하의
뜻을 전해야 마음이 편할것 같다.
만약 큰형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104살에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증손부를 맞는 경
사가 된다. 그러나 유명을 달리했으니 형을 대신해서라도 우리 반남박씨 세대로 27세
(世)의 큰 인물이 될 暻雨를 24세인 종증조부가 진심으로 받들고 앞날을 축복한다.
또 우리 가게(家系)로 치면 찬주도 경우도 군령골 큰 산소 19세(世)시운(時雲)할아버지
의 직계(直系)손이고 부랭이 박씨의 대부분이 같은 자손이다.
앞서가는 직게손의 대성(大成)이 곧 그 집안의 상징(象徵)이다.
暻雨는 품성도 재질도 모두 범상(凡常)치 않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 모두 큰 열매 맺길
기다려 보자.
暻雨의 결혼과 앞날의 대광영을 기원한다.
2018, 8, 20 대구 신암동 종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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