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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官公派譜編纂에 參與

判官公派譜編纂에 參與 1980(庚申譜) 中央譜所에 對한 不信의 壁을 높이 쌓고 지내던중 1998年에 우리 判官公派만의 派譜刊行의 일이 생겼다. 우리 門中에서는 여러번 큰兄님(勝德)이 門長으로서 이 일을 맡아 왔지만 이제 老齡에 큰 負擔을 드릴 수 없고 또 推進體構成員이 같은 年輩, 親知들이며 그리고 우리 門中에 마지막 奉仕의 機會가 될듯하여 마음을 바꾸어 이 일에 敎授公집을 代表한 修單員을 맡기로 했다. 榮州譜所를 大邱에서 자주 往來하면서 이에 對한 情報도 얻고 親密한 信賴關係도 쌓아 갔다. 또 이 機會에 지난날 콧대 높았던 中央譜所에서 못했던 族譜上의 誤謬도 비록 派譜이기는하지만 匡正하는 絶好의 機會로 삼기로 한것도 參與理由라 하겠다. 11世 敎授公집은 季派7兄弟中 맞집이며 以下世系가 좀 複雜하다. 1..

回顧輯草案 2008.05.01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族譜, 庚申譜(1980)編譜때 겪은일 族譜(족보))란 한 族屬(족속)의 世系(세계)를 적은 책이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이에 집착한 世代(세대)로 살아왔다. 방대한 양의 족보 全帙(전질)을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소장하고 있기는하나 그것을 펴보는 일은 극히 드물고 평소엔 잊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대개 30년을 주기로 새 족보를 또 만든다고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우리도 7차로 1980년에 庚申譜(경신보)를 새로 발간했고 아직 30년도 안된 지금 또 8차로 족보를 만든다고 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우리는 판관공 파포를 2000년 (庚辰)에 발간한 후이므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여 추진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된다. 우리 小宗中(소종중)은 2차인 癸亥譜(1..

回顧輯草案 2008.05.01

긴歲月 가난과 함께

긴歲月 가난과 함께 내가 成長한 그 때는 國民所得 60弗도 안되는 貧困한 때이므로 모두가 가난을 겪었던 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챙피스러운 일이기도하나 내 몫의 成長過程이었으므로 所重하게 記憶하고 싶어 이 글을 적어 보련다 어릴때의 기억은 별로 없으며 젖이 모자라 일찍부터 암죽으로 컸다고 한다. 암죽 끄리기가 얼마나 성가신 일이었을까! 그런 後天的인 要因이 있어 筋骨이 薄弱하고 맺힌데 없이 키만 훌쩍 커버린 것일까?......日帝때 中學生은 아랫종아리에 게도루(脚絆)을 감고 다녔으므로 그 아랫도리가 볼모양이 없어 恒常 부끄러웠다. 먹거리가 不足했던 때이기에 송구(松皮)는 자주 먹었고 어릴때 송구물(松皮와 木質사이에 있는 달콤하고 軟한 樹液)을 많이 먹어 吐하고 설사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송구는 물이 오..

回顧輯草案 2008.04.09

就職하고 터진 6,25

就職하고 터진 6,25 就職이 어려웠던 時代에 아버지의 努力으로 當時 鳳城面長인 邊ㅇㅇ氏에게 오랜 請託끝에 얻은 자리가 鳳城面農業統計士였다. 人事書類 내고 出勤키로 했는데 다음날 出勤하니 擔當者가 하는 말 "그 자리는 取消됐다고,,,,,,"황당했으나 그대로 돌아왔다. 後에 所聞에 依하면 면사무소에 勤務하던 某氏가 그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고 이 촌놈은 한마디 抗議도 못하고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敎員任用試驗이 있음을 알고 應試 合格하여 敎生實習을 거쳐 1949,6,20에 鳳城國民學校로 發令이 났다 好事多魔라 했던가 슬픈일도 함께 찾아왔으니 그 해 겨울 58歲를 못채우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就職을 기뻐하시고 장날이면 窓밖에서 내 授業하는 모습을 지켜 보시기도 했는데,,,,,장국밥 막걸리 한잔에..

回顧輯草案 200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