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108

맏이의 출가(出嫁),인심은 조석변(朝夕變)

맏이의 출가(出嫁),인심은 조석변(朝夕變) 대구 오기 전 1981, 5, 17, 맏딸은 출가(出嫁)시켰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온다. 정치권의 선거구 축소 조정에 따라 사무국 요원도 조정됐었다. 그 지침(指針)에는 나는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이를 어겨 나를 나가게 만들고 대신 전직(轉職)을 (XX면 면장(面長) 권했다. 이를 사양했지만 뒤에 딸의 취직을 희망해 두었었다. 마침 마땅한 자리가 었었는데 그것 마저 불발로 끝나 그들을 믿었던 나를 원망하고 잊어 버렸었다. 지난 후에 생각해도 모두 내 맘 같지 않았고 자신들 실속만 채우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전직(轉職)을 사양한 것은 너무 옹졸한 처신이었다. 어쩻던 몸을 낮추어야 할 때인데 인사에 대한 불만, 패배(敗北)해서 쫓겨난다는 쓸데 ..

回顧輯草案 2021.10.19

맞벌이로 새기반(基盤)

맞벌이로 새기반(基盤) 지금이야 손으로 글씨 쓰는 세상은 아니지만 그 때(1980년대)는 글씨 잘 쓰는 것도 삶의 도움이 됐었다. 남 보다 좀 보기 좋게 쓰는 글씨........ 그것 때문에 고향 지인의 소개로 요즘 말하는 "알바"를 했었다. 3사람이 20여일 일하고 끝이 났지만, 며칠 뒤 그 곳에서 나에게만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나가 보니 새로 시작할 일 (그 기관의 중요정책) 이 있으니 그 일을 처음 부터 맡아 달라는 것이었으니 취직이 된 셈이다. 고소원(固所願)의 처지인데 하늘이 도왔다. 약체질. 고령으로 막노동도 못하는 딱한 처지였는데....... 이렇게 50대(代)에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모든 것을 겪어 보고 지켜 보더니 그 곳에 꼭 필요한 인물로 인정 받아 13년을 넘게 근무했었다. 나도..

回顧輯草案 2021.10.19

혹독(酷毒)했던 시련(試練)

혹독(酷毒)했던 시련(試練) 나도 세상에 나와서 남들 처럼 직장 가지고 3남매 키우며 살았었다. 순 촌사람인 내가 군소재지에서 크는 아이들과 같이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한 세상 잘 보냈었다. 군 소재지에서는 그래도 아이들 학교 성적은 늘 주위의 호평을 받았고 기억 해 주는이도 많았었다. 이렇게 살다 인생역정(人生歷程)의 내리막 길을 만나 낙오자(落伍者)가 되어 빈손 맨주먹 으로 객자에 훌러 들어왔다. 오고 보니 막막했던 심정은 필설(筆舌)로는 모두 표현 못한다. 월새방에서 주인 눈치 볼 것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부자유스런 주거 공간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식구 모두 참 많은 고생을 했었다. 봉화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반찬 값이라도 보탠다고 했으니...... 대구에서 인생살이를 새로 배..

回顧輯草案 2021.10.18

대망(大望)

대망(大望) 2015년 늦은 봄, 안동 장조카가 만든 기회에 4년만에 가슴에만 묻어 두려 했던 고향 산천을 한 바퀴 돌아 왔다. 온 가족의 폐만 끼치고 왔지만....... 그 동안 이곳 저곳을 돌아 보면서 가슴 뿌듯한 감동을 받은 것이 있어 이를 그대로 옮겨 놓는다. 그 가운데 하나는 고향에서 하던 생업을 대전환(大轉換)하여 생애의 승부를 건듯한 새로운 일터를 만든 곳을 찾아 봤다. 형님이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막내 갑서 (甲緖)내외가 혼신의 정력을 다하고 있는 상운(祥雲)의 육우사육장이다. 놀란 것은 한고을을 몽땅 찾이한 광대한 공간이요, 또 놀란 것은 어마어마한 시설규 모였다. 그리고 또 사육하고 있는 정확한 두수를 주인도 잘 모른단다. 늘 출산하고 크면 축사를 옮겨 주고 또 수용할 자리를 비우기..

回顧輯草案 2021.10.17

영모비(永慕碑)수립의 역사(役事)

영모비(永慕碑)수립의 역사(役事) 2001년 우리 대가족 164명이 합심하여 세운 아버지 영모비(永慕碑)는 우리 세대가 이룩 한 가장 자랑할만한 장거(壯擧)라고 자부(自負)해 본다. 이에 대한 문헌이 남아있어 거기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으나 다시 그 대강을 추려 보면 볼수록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형님의 제의를 받고 비문(碑文)을 다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우리 가사에 남을 것이기에 명문(名文)은 아닐지라도 문장(文章)으로서의 흠결(欠缺)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정(修正)에 수정을 거듭 했으며 자구(字句)하나에도 신경을 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문의 작자(作者)도 명시 못했다. 자식이 지으면 안된다나? 말도 많아서........ 지난 2000년 10월 어머니 기일(忌日)에 참례하고 거기서 처음..

回顧輯草案 2021.10.17

환갑,진갑의 회고(回顧)

환갑,진갑의 회고(回顧) 1983년에 대구에 빈 손으로 와서 5년만인 1988년말에 아파트에 입주하고 겨우 잃어버렸 던 내집을 찾아 안착 했으니 이로서 집 없는 서러움을 덜었었다. 고향 떠날 때 큰집 가족들의 마음은 빈 손으로 객지에 떠나는 것을 무척이나 안스러워 했 을 것이다. 어쩌면 봉화에 내가 있다는 것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 가는 한 거점(據点)일 수 도 있었을 것인데....그것이 없어져 서운했을는지도........ 세월이 흘러 1990년의 환갑은 그저 생일 처럼 보냈다. 부모 생각에 또 내 처지에 환갑이라 고 야단스럽게 나설 일도 아닌듯 했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7년....아들 결혼식에 먼 곳에서 와서 당일 돌아가신 일, 7년 동안 대구 생활 에서 이룩한 것들....이제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 가..

回顧輯草案 2021.10.17

명당에 모신 생원(生員) 할아버지

명당에 모신 생원(生員) 할아버지 군량골 산 소유 명의를 꼭 변경등기해 두어야할 당위성(當爲性)이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 집 내력과 연관되어 있다. 먼 훗날 우리집 역사에 관심 있는 후손이 나타나면 참고가 될 것이라고 믿어 적어 둔다. 군량곡(軍糧谷)산은 옛날에 사람보다 산이 더 많았던 시절 ....재산의 개념보다 묘지 (墓地)에 대한 관심이 더 컸을 1800년대에 19세(世) 시운(時雲)__성균생원(成均生員) __할아버지 묘소를 마련하기 위해 장자이신 20세(世) 종익(宗益)할아버지 3형제가 집안 어른이신 고희(古稀)의 백부(伯父)를 모시고 연장(年長)이신 종형(從兄)과 함께 뜻을 모아 군량골과 연고(緣故)를 맺은듯 하다. 그러하기에 군량골 산의 존재의의(存在意義)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것 같다. 족보의..

回顧輯草案 2021.10.16

군량곡(軍糧谷)산의 입목벌채(立木伐採)

군량곡(軍糧谷)산의 입목벌채(立木伐採) 이 산은 보안림(保安林)이고 도로변이라 벌채허가(伐採許可)가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형님이 입목(立木)을 상인에게 지상권 설정등기(地上權 設定登記)를 해주고 매도한 후 수년이 흘렀었다. 그 대금의 처리는 위로 형님께서 하신 일이라 알 수 없었고 산주(山主)명의를 큰형님 앞 으로 변경해야할 시점에 이르러 이의 해결을 나에게 부탁했었다. 해결방법은 우선 매수자에게 계약해제를 위해 배상 해야 하고 배상금을 충당하기 위해 서는 벌채를 해야 하는 어려운 조건 뿐이었다. 우선 입목 매수자를 찾아가 꿇어앉아 빌다 싶이 간청했다. 사채를 빌러 대금을 계약조건 대로 배상하고 지상권 말소서류를 구비하여 말소 시켰다. 겸해서 큰형님 앞으로 명의변경 등기도 해 드렸다. 이렇..

回顧輯草案 2021.10.15

남아 있는 늦동이 형제(兄弟)

남아 있는 늦동이 형제(兄弟) 5형제중 위로는 모두 돌아가시고 나와 동생만 남았다. 통상 막내는 위로 부모형제의 사랑과 보호를 받기만 하고 자란 존재지만 많은 식구가 살고 있었던 우리집은 그렇지 못했었다. 클때의 기억은 별난 것이 없다. 나이 차가 별로 없었으니까.... 국민학교때는 담임이 중학교 선배라서 자주 만났고 어느 해 가을 소풍지인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같이 1박(泊)한 추억이 남아있다. 우리집 뿐 아니라 그 때의 농촌사정은 다 그러 했지만 가난이 겪는 일은 모두 겪었다. 먹거리, 입을 거리, 주거공간....철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늙어서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공부를 했고 이렇게 성장 했을까? 하고 인간의 한계란 없는 것이고 적응력 도 끝이 없는 것이라고 믿..

回顧輯草案 202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