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108

해법(解法)못찾은 오해(誤解)

해법(解法)못찾은 오해(誤解) 춘양 도심(春陽,道心)에 거주하는 김녕김씨(金寧金氏)집안으로 출가하신 두째 고모의 여러 형제중 위로 형제를 비롯 3형제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나도 해방후 무질서와 들뜬 세상 분위기를 타고 무지게 같은 꿈을 안고 한번 찾아가 본 일이 있었다. 6,25후에는 서로 소식을 몰라 내외종간도 무색해졌고 세월이 흘러 세대(世代) 도 바뀌어지니 특별이 찾을 일도 없거니와 그것을 챙길 어른들도 안 계셔서 지금이야 관심 밖의 일이 돼버렸다. 일정시대(日政時代) 나도 아주 어렸을때 일이지만 여러번 들어 본 어른들의 이야기이고 아주 답답했던 사연이기에 그 내용의 전말과 나 혼자만의 생각을 적어 보았다. 아버지와 큰 고종형 사이에 얽힌 사연이지만 원인을 풀지 못해 상호 오해로 말미암아 불신(不..

回顧輯草案 2021.10.01

분노(憤怒)의 표출(表出)

분노(憤怒)의 표출(表出) 태펑양전쟁(太平洋戰爭,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세계2차대전)이 한창인 1943 년경(頃)의 일이다.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조달하기 위한 방편인지는 무르겠으나 농가에 꼭 있어야 할 농우(農牛)를 강제 징발해 가는 일이 있었다. 운이 나빠서 그런지 우리 집도 이런 기막힌 수난을 당했었다. 어느날 하교길에 솔무래에 들렸는데 아버지가 관리(官吏)같이 보이는 사람을 붙들고 애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계셨다. 한참 옆에서 들어 보니 우리집 황소가 매여 있는데 그 소를 징발대상으로 지목 한 것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야 전기, 기름, 농기구가 기계화 되어 모든걸 해결해 주지만 그 시대에는 모두 인력으로 해결했고 논갈이, 밭갈이, 운반등 힘드는 일은 소의 힘을 빌렀..

回顧輯草案 2021.09.30

분가(分家)의 기억

분가(分家)의 기억 분가(分家)......옛날에는 "살림 난다" 고 했다. 그시절의 집이란모두 토담집이었고 목조(木造)건물로는 내 출생하던 해에 우리 집 본채를 허물고 목조로 새로 지었다고 들었으니 큰 관심사였을 것이고 나와는 동갑 인 셈니다. 내가 철 들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앞의 밤실형님집 사랑채와 뒷집 성곡할배가 거처 하시던 사랑채가 목조였다. 제일 큰 규모의 집은 종가집이었고 "까치구멍집"이라고 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천아재 집터에 있었다. 우리 집의 분가 시기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우리집 분가는 요즘 세대의 분가와는 달리 좀 특이(特異)했었다. 단지(單只) 한집에 식구가 많아 식생활을 따로 하는것 외는 별로 다른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나누어서 자식들을 관리하는 모양..

回顧輯草案 2021.09.30

따뜻한 가장(家長)...며느리 사랑

따뜻한 가장(家長)...며느리 사랑 아버지는 물야(物野) 오록 출신으로 1930년대 초반에 한글(그때는 언문이라고 했다)을 해독했던 맏며느리를 맞아 무척 아끼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첫 머느리를 맞았으니 그럴 것이리라..... 후에 짐작되는 것은 두동 사장어른 (큰생질의 조부. 한학자(漢學者), 법전 강(姜)씨 집안에 가신 고모댁, 그리고 거촌, 바래미, 조향(祖鄕)영주의 소고집등 이름있는 분들과 교류하시면서 견문도 넓히고 일상생할에 그 영향도 많이 받으신것 같았다. 특히 며느리에 대한 모든 것은 각별하셨다. 안에서 읽을 책도 구해 오시고 안으로 사돈간에 교신한 소위(所謂) "사돈지"라는 것을 읽게 하시고 지어 보라고도 하셨 다. 금정으로 출가한 고모의 문장(文章)이나 필체(筆體)가 좋아 오시면 같이 지내..

回顧輯草案 2021.09.29

큰들의 옥토(沃土)농지개혁

큰들의 옥토(沃土)농지개혁 마을 입구의 보호수(保護樹)인 느티나무 밑 큰 들의 논은 끝부분을 제하고 모두 우리가 경작 했었다. 식량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소출되었음은 물론이고 오랜 세월 숱한 애환이 스쳐 갔던 농토였다. 8,15해방후 농지개혁(農地改革)은 남북이 각기 서두른 정책이었고 북은 무상분배, 남은 유상으로 분배했었다. 이 정책은 지금 남(南)이 성공했다는 평가지만 우리는 국가가 베푸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었다. 우리 헌법과 농지법에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규정되어 있다. 이 농지개혁제도는 경작자가 1년에 그 소출의 30%씩 5년간 150% (3:7제로 상환 ....이를 상환곡이라 했다.) 를 국가에 상환하고, 지주는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받아 국가가 증권상환을 해 주는 ..

回顧輯草案 2021.09.28

당(堂)집앞 들의 논(畓)

당(堂)집앞 들의 논(畓) 농토는 생명의 원천 같은 것...이 고을에 있는 많치 않는 농토도 이 고을을 개척한 우리 집안이 찾이 하지 못하고 외지인의 소유가 많았다. 그 시절 집성촌(集姓村)에 연고 없는 타성(他姓)이 사는 것도 반길 일은 아니였고 타인 소유가 된 농토도 반길 일은 아니지만 불가 항력으로 치부했겠지.....자손이 많지 않았고 경제력도 따라와 주지 못 했을 것이니까......... 일제 말기 성황당(城皇堂) 앞들의 논이 팔려나갈 기회가 있었다. 이를 한두집이 사지도 못하고 3등분하여 위쪽은 우리가, 중간은 창평(昌坪)사가, 밑쪽은 성곡할배......이렇게 나누어 샀다. 농촌에 거금이 없기에 이 논을 담보로 당시 긍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자금을 조달했었다. 이것이 훗날 작은 형님의 문전옥답이..

回顧輯草案 2021.09.27

춘궁기(春窮期)에 남겨준 밥맛

춘궁기(春窮期)에 남겨준 밥맛 숙명처럼 대(代)를 이은 빈곤.....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 것은 우리 조상도 또한 같다. 하늘만 쳐다 보고 경작했던 천수답(天水畓)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 대량(絶對量)의 식량은 태부족이었다. 때 맞추어 비가 안 오면 그해 농사는 망쳤으니......그저 하늘의 자비를 기원하면서 살아 왔다. 고을에 흉년 들어 닥치는 춘궁기가 요즘 말하는 '보릿고개'이다. 이 때가 오면 먹거리가 삶의 전부가 된다. 동내 집안 형편들이 모두 그만 그만 하지만 그래도 그해 작황에 따라 춘궁기를 넘기 는 정도가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어느해 봄날 아버지가 마루에서 점심을 드시다가 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어린 우천 아제가 짐심때가 지났는데도 둔덤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시더니 드시던 점심밥을 ..

回顧輯草案 2021.09.26

아버지는 어떤 어른이었을까?

아버지는 어떤 어른이었을까? 새월이 흐르고 늙어 보니 옛일들도 하나 둘씩 읻혀져감은 자연적인 현상이리라... 먼저 가신 형들은 많이 기억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것 같다. 들었다고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여기 몇가지 이야기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더듬어 본 것이다. 너무 주관적으로 흐른 감도 있으나 이것이라도 남겨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우리 선대는 이런 생각과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고 지금과 비 교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삶이 된것도 있지만 그래도 오늘날 우리를 있게한 어른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들어 보기 어려운 소중한 내것이 될것이라고 믿어 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回顧輯草案 2021.09.26